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 등록일
- 2015.07.13
- 작성자
- 관리자
분류 | 금석문/ 고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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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조선 1647년(인조 25) |
수량/재질 | |
크기 | 전체 높이 380㎝, 비신 235×59×60㎝ |
찬자 | 장유(張維) |
지정현황 | |
1647년에 해남 대흥사에 세워진 휴정대사의 비문이다. 청허가 입적한 후 28년이 지난 1631년, 청허의 법사(法嗣)인 쌍흘(雙仡)이 해안(海眼)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당시 홍문관 대제학인 계곡(谿谷) 장유(張維)를 찾아와 명(銘)을 지어주기를 부탁하였다. 그러나 이 찬문은 바로 비에 새겨지지 않고 16년이 경과한 후인 1647년에 제작되었다. 비문의 내용은 먼저 대사의 출가 전 속가의 가계(家系)와 성장과정, 출가와 21세 때의 수계·인가과정을 서술하였다. 이후 선과(禪科)에 급제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의 지위까지 올랐던 일, 1556년 기축옥사에 모함을 받아 투옥되었으나 선조의 국문(鞠問)과정에서 풀려난 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3세의 노구로 왕명에 따라 팔도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이 되어 승병 1,500명을 모집, 명나라 군대와 합세하여 평양 수복에 공을 세운 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공로로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가 되었으나, 1594년 유정(惟政)에게 승병을 맡기고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러다가 1604년 정월 23일 글을 써서 유정과 처영 두 문인과 작별을 하고는 앉아서 입적하니 세수 85세, 법랍 65세였다. 특이한 향기가 방안에 가득 차더니 며칠이 지나서야 사라졌다고 한다. 다비를 하여 얻은 영골 1편과 사리 3립으로 보현사(普賢寺)와 안심사(安心寺)에 탑을 세워 봉안하였고, 유정 등은 정골 1편과 사리 몇 과를 얻어 유점사(楡岾寺) 북쪽 언덕에 장사지냈다. 제자가 천여 명이나 되었으며, 대사가 저술한 『선가귀감(禪家龜鑑)』, 『선교석(禪敎釋)』, 『운수단(雲水壇)』, 『삼가일지(三家一指)』 각 1권과 『청허당집(淸虛堂集)』 8권이 당시 총림에 유행하고 있다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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