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서산대사표충사기적비(西山大師表忠祠紀蹟碑)
- 등록일
- 2015.07.13
- 작성자
- 관리자
분류 | 금석문/ 고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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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조선 1791년(정조 15) |
수량/재질 | |
크기 | 전체 높이 372.3㎝, 비신 251×110.8×50.2㎝ |
찬자 | 서유린(徐有隣) |
지정현황 | |
서산대사 입적 후 187년이 지난 시점인 1791년에 대사를 기리는 표충사를 건립하고 세운 비석이다. 비문의 내용에 의하면, 서산대사의 법명은 휴정(休靜)이고, 호가 서산(西山)이며, 혹 청허자(淸虛子)라고도 한다. 속성(俗姓)은 최씨이고 안주(安州) 사람인데, 10세에 부모를 여의고서 출가하여 20세에 수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으로 임명하자 제자인 유정(惟政), 처영(處英) 등과 함께 승병 5천여 명을 규합하여 공을 세웠다. 대사의 행적에 관해서는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와 계곡(谿谷) 장유(張維)의 비명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1604년(선조 37)에 세수 85세, 법랍 65세로 입적하였는데, 임종 시 제자들에게 사후에 의발(衣鉢)을 반드시 해남으로 보내달라고 유언하였다. 대사가 입적한지 185년이 지난 1788년(정조 12)에 7세 법손인 천묵(天黙) 등이 해남 대둔사 남쪽에 사우(祠宇)를 건립하고, 편액을 써 줄 것을 조정에 청하자 정조가 ‘표충(表忠)’이라고 사액하였다. 이보다 앞서 영남에는 서산의 제자인 유정을 기리는 ‘표충’이라는 사당이 먼저 있었으니, 이제 비로소 스승과 제자 두 사람이 영남과 호남 천리 안에서 서로 성대하게 사당에 향사되게 되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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