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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

  •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선암사

사찰소개 자연환경 역사 가람배치 문화재 인물 설화 안내
선암사의 역사
    • 선암사의 창건에 관한 이야기는 두 가지가 설이 있다. 하나는 『순천부조계산선암사제육창건기(順天府曹溪山仙岩寺第六創建記)』와 「조계산선암사사적비(曹溪山仙巖寺事蹟碑)曹溪山의 내용을 따라 529년(진흥왕 3) 아도화상(阿道和尙)이 개산하여 청량산(淸凉山) 해천사(海川寺)라고 했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선암사사적기(仙巖寺寺蹟記)」와 「선암사중수비(仙巖寺重修碑)」의 내용을 따라 875년(헌강왕 1)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비보사찰로 창건하여 선암사(仙巖寺)라 하였다는 설이다.

      기록 등을 종합해볼 때, 아도화상이 비로암에서 작은 암자격인 해천사를 개산하고 현재 자리에 사찰의 격식을 갖춘 것은 도선국사에 의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타당할 것이다.
    • 선암사 전경 선암사 일제강점기 때 전경
    • 선암사의 초창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각국사중창건도기(大覺國師重創建圖)」를 통해 고려 중기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에 의해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졌고, 그 규모로 보아 2차 대각국사의 중창으로 선암사의 대체적인 윤곽이 잡혔던 것으로 보인다. 선암사에는 현재 3개의 부도가 있는데 10세기 초반으로 추정되는 선조암지부도(禪助庵址浮屠)와 10세기 후반의 것으로 보이는 무우전부도(無憂殿浮屠), 대각암부도(大覺庵浮屠)가 그것이다. 이중에서도 대각암부도는 의천의 부도로 추정되고 있으며, 응향각에는 대각국사의 형인 고려 선종(宣宗)이 의천에게 하사한 가사가 있어 선암사와 의천과의 관계를 알 수 있게 한다.
    • 선암사 중수비 선암사 중수비
    • 조선시대 선암사는 1597년 정유재란으로 모두 소실되고 일부만이 남은 것을 현종(顯宗) 때 승려 경잠(敬岑), 경준(敬俊), 문정(文正) 등의 주관으로 8년간 중창불사를 하여 원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4차 중창불사는 약휴대사(若休大師)에 의하여 진행되었는데 1698년에 원통전을 건립하고 1703년에 대법당을 수리하였으며 오십전을 중건하였다. 1707년에는 승선교를 중건하고, 「선암사중수비」를 세웠다.

      1759년에 있었던 대화재로 선암사의 많은 건물이 소실되자 다시 5차 중창이 일어나 1761년에 승려 상월(霜月)과 서악(西岳)에 의해 진행되었다. 이때의 불사는 551명의 역군이 참여한 큰 중창공사였는데 이에 관한 내용은 팔상전에서 발견된 상량문에 기록되어 있다. 이때 상월대사가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비보로 산 이름을 청량산(淸凉山)이라 하고, 절 이름은 해천사(海川寺)로 고쳤다고 한다.
    • 6차 중창불사는 1823년(순조 23)에 발생한 화재로 대웅전, 명부전, 정문로 향로전, 설선당, 심검당 등이 소실되자 이들을 복원하기 위해 1824년부터 시작되었다. 이때의 중창기록은 『순천부조계산선암사제육창건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여러 사찰의 승장들과 선암사의 승려 300여명이 동원되어 짧은 기간 동안 이루어 냈다고 한다. 6차 중창불사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들은 승려 해붕(海鵬), 눌암(訥庵), 익종(益宗)등이었다. 먼저 대웅전, 명부전, 정문루, 향로전을 중수하였고 1825년에 심검당과 설선당을 중건하였다. 또한 이 때 다시 조계산 선암사로 이름을 복칭하였다. 1933년에 작성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실린 선암사의 사진을 보면 1824년 이후에 있었던 6차 중창불사의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해방 이후 선암사는 1948년에 있었던 여수사건과 한국전쟁으로 또 한 번 피해를 겪었으며, 1952년에는 토지 개혁으로 사찰의 많은 재산이 팔려나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주요 전각들은 6차 중창 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최근까지도 대웅전 및 다른 전각들을 보수하거나 건립하고 있다.
연표
선암사 연표
연대 내 용
529년 아도화상이 이곳으로 와서 산 이름을 청량산, 절 이름을 해천사라 함
9세기 도선국사가 비보도량의 하나로 선암사를 창건함
11세기 대각국사가 칠전선원을 세우는 등 선암사올 크게 중창함
1540년 일주문을 중수함
1597년 정유재란 때 큰 피해를 입어 1철불, 2보탑, 3부도, 문수전, 조계문, 창측 등만 남고 모두 소실됨
1655년 원각경 선암사에서 개판(開板)함
1660년 승려 경잠, 경준, 운정 등이 도반 10여명과 함께 사찰 중수를 시작함 이후 8년 동안 중창불사를 계속함
1707년 승려 호암이 승선교를 축조, 「선암사중수비」를 세움
1759년 화재를 만나 큰 피해를 봄
1760년 승려 상월과 서악이 선암사를 중건함
1761년 상월대사가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산명을 청량산으로 사명을 해천사로 개칭함
1797년 승려 해봉이 칠전선원을 중건함
1823년 화재로 대웅전을 비롯한 불우 4통과 요사 6동이 불에 탐
1824년 승려 해붕, 눌암, 익종 등이 대웅전을 비롯한 4동을 중건함
1825년 승려 심검이 설선양당을 중건하고 산명을 조계산, 사명을 선암사으로 복칭 함
1906년 선암사 승선학교를 세움
1911년 일제총독부가 30본산제도를 시행할 때 선암사는 호남지역 본사 중 하나가 됨
1914년 선암사 말사인 증심사를 중심으로 하여 광주 북쪽에 포교당을 건립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