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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곡사

  •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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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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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곡사의 가람배치
마곡사 가람배치 대웅보전 영산전 대광보전 명부전 응진전 해탈문 천왕문 흥성루 심검당·고방 매화당·수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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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곡사는 개울을 경계로 남원과 북원으로 구분된다. 남원은 영산전, 북원은 대광보전을 중심건물로 하는데, 두 중심 영역이 합쳐지기에는 공간이 협소하다. 따라서 지형의 면적과 지세의 흐름에 맞추어 북원의 대광보전은 서남향으로, 남원의 영산전은 동남향으로 배치하여 두 영역이 직교가 되도록 구성하였다. 이렇게 나누어진 두 영역을 연결하기 위해 그 사이에 배치한 해탈문과 천왕문은 적절하게 방향이 단계적으로 틀어져 무리하게 단선축으로 진입하여 건물들을 비스듬하게 바라보지 않고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유도하였다.

대웅보전(大雄寶殿)

마곡사 대웅보전

대광보전의 뒤쪽, 산 위에 위치하고 있는 중층불전으로 하층 전면 5칸, 측면 4칸, 상층 전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비탈면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넓은 대지를 확보할 수 없었고, 축대 위에 만들어진 앞마당은 매우 좁은 편이다. 대광보전 앞마당에서 보았을 때, 규모가 크고 수평적인 느낌이 강한 대광보전 뒤편으로 대웅보전이 수직적인 느낌을 더한다. 또한 대웅보전의 상층 부분만이 보여 중첩된 처마로 인한 건축적 공간감을 배가시키고 있다. 이처럼 두 개의 전각이 높낮이를 달리 하면서 하나의 시야 속에 들어오도록 앞뒤에 겹쳐서 배치된 예는 다른 사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마곡사만의 특징이다.

대광보전의 하층과 상층의 공포는 모두 내외3출목(내외7포)의 다포식으로 동일한 구조이다. 기둥 위에 창방을 짜고, 그 위에 평방을 올려 공포대를 받도록 하였다. 바닥 전체에 우물마루를 들였고, 천장에도 우물천장을 들였다. 대웅보전이 지닌 건축양식은 조선후기에 속하나 조선후기의 전형적 특성이 발현되기 전의 모습을 지니고 있으므로 17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공산지화산마곡사이층대장전단청기」에는 건물명이 대장전(大藏殿)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 분명하게 2층이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내부 고주에 시주자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 등 고주를 비롯한 포벽 등 곳곳에 많은 묵서가 적혀 있다. 불전에서는 흔하지 않은 것으로 이 건물이 원래 불전이 아니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대웅보전이 위치한 터가 매우 협소하며, 상층의 벽이 판벽으로 구성된 점 역시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에 의하면 마곡사는 1650년부터 각순에 의한 중창불사가 이루어져 사격(寺格)을 갖추었고, 1782년 대화재로 법당을 비롯한 1,050여 간의 건물이 소실되어 1785~1788년에 걸쳐 법당, 즉 현재의 대광보전이 중건된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대장전은 1650년 각순에 의한 중창 불사로 조영된 후 1782년의 화재 때 대장전은 소실되지 않았고 임시로 법당으로 사용하였을 가능성을 추정해볼 수 있다. 1985년 해체 공사 중에 ‘康熙二年 癸丑 五月’(1663년), ‘康熙三十四年 乙亥’((1695년), ‘乾隆二十七年 壬午’(1762년) 등의 명문이 적힌 기와가 확인된 점 역시 이 건물이 1782년 대화재에 소실되지 않고 유지되었을 가능성을 준다. 언제부터 대웅보전으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879년의 「충청우도공주태화산마곡사대웅전현판」에 따르면 적어도 이때부터는 대웅보전으로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내부에 삼세불(석가모니불-약사불-아미타불)을 봉안하고 있으며, 보물 제801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산전(靈山殿)

마곡사 영산전

영산전은 마곡사 남원의 중심 불전으로 동쪽으로 비탈진 지형에 맞추어 동향을 하고 있다. 전면 5칸, 측면 3칸의 주심포식 건물로 맞배지붕으로 전면에만 겹처마로 구성하였다.

영산전은 비탈진 지형의 전면에 두 단의 석축을 쌓아 기단을 마련한 위에 세워졌다. 기단과 축대는 모두 자연석을 이용하였고, 기단의 정면 중앙에는 기단과 같은 재질의 자연석을 이용해 계단을 만들었다. 기단 윗면은 강회에 흙을 섞어 다졌으며, 초석은 막돌을 이용했다.

기둥은 모두 원주로 전후면의 평주는 비교적 반듯한 것이 많으나 휜 것도 포함하고 있으며, 측면과 내부의 고주는 심하게 휜 것을 사용하고 있다.

바닥에는 전체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전체에 우물천장을 들였으나 지붕의 경사에 맞추어 중앙부를 전․후면에 비해 한 단 높게 처리해 변화를 줌과 동시에 내부공간의 높이를 높이고자 하였다.

휜 부재를 많이 사용하고 전면과 후면의 공포구성과 처마를 다르게 처리한 점 등은 임진왜란 후의 열악한 경제적 상황과 목재의 부족 현상을 반영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 건물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 조선시대 후기의 건축적 경향이 일반화되어가기 전 시기의 과도적 건축적 양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건축적 특성과 함께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 등의 기록을 고려하면 영산전은 1650년에 중건된 것으로 현존하는 마곡사의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영산전은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나한상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 건물은 칠불(七佛)을 중심으로 천불(千佛)을 모시고 있다. 이로 인해 영산전은 천불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정면의 현판은 세조가 1465년에서 1487년 사이에 마곡사에 들렀다가 내린 친필이라 한다. 현판 한쪽에는 ‘세조대왕어필’이라 쓴 방서가 있다. 현재 보물 제800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광보전(大光寶殿)

마곡사 대광보전

마곡사의 북원 영역의 중심 건물로 앞쪽에 넓은 마당을 둔 뒤에 자리 잡고 있다. 전명 5칸,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이다.

기둥은 모두 원주로 막돌초석 위에 세웠다. 기둥의 대부분은 원목의 휜 상태를 그대로 활용하였으나 민흘림기둥으로 안정적인 형태감을 준다.

대광보전은 기둥의 배열과 보를 거는 방법에 있어 네 개의 보방향 기둥열 가구를 모두 다르게 했다. 이처럼 하나의 건물에 복잡하고 다양한 가구법을 구사한 예는 다른 건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 건물만의 특징이라 할 수 있으며, 그것은 대광보전을 중건할 때 마곡사가 처했던 상황과 관련해 복합적인 평면을 구성할 필요가 있었고, 그러한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기둥 배열에 변화를 준데 따른 결과라 할 수 있다.

대광보전 내부 불단은 정면이 아닌 측면에 위치하고 있다. 마곡사는 1782년에 대법당을 비롯한 1,050여 간이 소실되는 대화재가 발생한다. 이후 가장 먼저 대법당이 중건되는데, 이 대법당은 본존불 외에 사찰 전체의 예불의식을 수용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에도 본존에 따른 불전의 명칭 대신 대법당이라는 기록을 남겼고, 그 대법당이 바로 이 대광보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존상 앞 예불공간을 넓게 확보하고, 다양한 예불의식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본존을 측면에 위치시키고, 기둥배열에 변화를 주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대광보전의 보는 매우 심하게 휜 부재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휜 부재를 사용한 것은 기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휜 부재를 사용한 것은 목재의 수급이 그만큼 어려웠던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에 의하면 1782년에 마곡사에 큰 화재가 발생해 대법당을 비롯한 1,050여 간의 건물이 소실되었다고 한다. 그 후 체규를 화주로 마곡사의 중창이 시작되었고, 1785년에 이르러 대법당을 개건하기 시작해 1788년에 이르러 개건과 탱화의 단청이 완료되었다고 한다.

건물 정면에 걸려 있는 현판은 강세황(姜世晃)이 쓴 것으로 현판 한쪽 모퉁이에 ‘표암(豹菴)’이라 쓴 낙관이 찍혀 있다. 대광보전이 1788년에 완성되었으므로 현판도 이때 쓰인 것이라 한다면 강세황의 나이가 76세로 글체가 최고조에 달했던 말년에 쓴 것이 된다.

대광보전은 현재 보물 제802호로 지정되어 있다.

명부전(冥府殿)

마곡사 명부전

명부전은 남원의 북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명부전의 성격상 교화영역인 북원에 포함되어야 할 건물이나 이 건물을 지을 당시 북원 영역에 마땅한 터가 없었는지 남원 영역에 포함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조선 후기 명부전의 일반적인 규모를 따르고 있다. 공포는 주심포를 삼익공식으로 하였으나 각 주간에도 2구 씩의 공포를 배열하였다. 주간포는 주심포에서 초익공이 생략된 모습이다. 조선시대 말기인 19세기 이후에 사용되기 시작한 익공식과 다포식이 혼합된 공포 구성이다.

내부에는 후면과 양 측면 벽으로 ㄷ자형으로 불단을 만들고 지장보살을 비롯한 협시와 시왕 등의 권속을 모셨다.

건물 내부에 「명부전창건기」 편액이 걸려 있는데, 소화14년, 즉 1939년에 창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6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응진전(應眞殿)

마곡사 응진전

응진전은 대광보전 앞마당의 북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응진전은 석가삼존을 중심으로 주변에 16나한을 봉안한 건물로 나한전이라고도 부른다. 전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이다.

외1출목의 공포 구성은 주심포식 공포에서 주로 볼 수 있는 모습인데, 주간에도 공포를 배열함으로서 공포 배열에서는 다포식의 구성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주심포식의 간략한 공포형식을 따르되 주간에도 공포를 배열하여 다포식으로 구성하는 것은 조선 말기인 19세기경의 건축에서 나타나기 시작하는 새로운 모습이다.

응진전 안에 걸려 있는 「마곡사응진전신불량시주방명록」을 통해 1846년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응진전은 작은 규모의 전각으로 공포와 창호 및 천장의 구성 등에서 조선시대 말기의 건축적 특성을 보여준다. 현재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65호로 지정되어 있다.

해탈문(解脫門)

마곡사 해탈문

마곡사의 입구에 해당하는 문으로 내부에 금강역사상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금강문이라 부르기도 한다. 전면 3칸, 측면 2칸으로 주심포식 팔장지붕 건물이다. 중앙 어칸으로는 출입을 하도록 되어있고, 양 협칸에는 금강역사와 함께 문수동자와 보현동자를 모셨다. 어칸을 제외한 나머지 벽을 모두 판벽으로 구성했음이 특이하다.

금강역사와 문수동자 및 보현동자는 모두 소조이며, 문수와 보현동자는 각각 사자와 코끼리를 타고 있다. 금강역사는 장수의 복장을 하고 있으며, 얼굴이 신체에 비해 큰 편이고 험상궂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으나 조선시대 후기의 전형적인 익살스런 표정을 지니고 있다.

해탈문은 공포의 구성과 형태, 가구수법 등 전체적인 건축양식이 조선시대 후기 건축의 전형적인 특성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정확한 창건연대를 알려주는 기록은 없고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에 1846년에 승려 정순을 화주로 하여 중수되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해탈문 안에 「태화산마곡사해탈문중수기」가 있어 1910년에 중수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66호로 지정되어 있다.

천왕문(天王門)

마곡사 천왕문

천왕문은 해탈문을 통과한 바로 다음에 위치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어칸으로는 출입을 하도록 되어있고, 양 협칸에는 방위에 맞추어 사천왕상을 배치하였다. 어칸을 제외한 부분에는 모두 판벽을 두어 해탈문과 동일한 구성을 하고 있다. 주심포식으로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조성하고 박공에는 커다란 풍판을 걸었다. 공포의 형식과 가구수법으로 보아 조선시대 후기의 건축양식을 지니고 있으나 전형적인 조선시대 후기의 건축양식이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는 시기의 건물로 보인다.

사천왕상은 소조(塑造)로 화관은 화려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상호는 조선시대 후기의 전형적인 험상궂은 듯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외부 정면 협칸에 걸려 있는 「태화산마곡사천왕문중수기」에 1910년에 중수하고 단청도 새로 칠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해탈문과 같은 시기에 중수되었고, 건축형식도 거의 유사하지만 공포의 구성이 간략하고 살미의 초각 형식도 변화가 일어나는 등 해탈문에 비해서는 좀 늦게 건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62호로 지정되어 있다.

흥성루(興聖樓)

마곡사 흥성루

남원의 중심건물인 영산전 앞마당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건물이다. 강당으로 사용되는 건물로 누각 형식으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나 영산전 앞마당이 비교적 평지에 가까운 지형이고 그 앞의 한 단 낮게 조성된 대지는 해탈문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에 해당하므로 단층 형식으로 지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초익공식 맞배지붕 건물로 무고주5량의 가구를 지니고 있다. 영산전 쪽 건물 후면은 마당을 향해 어칸을 개방시켰고, 전면에는 5칸 모두 두 짝의 판문과 회벽으로 막았다. 영산전 앞마당을 향해서는 개방적이고, 그 반대편 바깥쪽을 향해서는 폐쇄적으로 만들어 담장과 함께 수행공간을 외부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한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초익공식 짜임의 구성과 초각 형태, 휜 부재를 적절히 활용하고 있는 가구의 구성 등은 조선시대 후기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에 의하면 흥성루는 조선후기 1844년에 중수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흥성루는 18세기말이나 19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심검당(尋劍堂)·고방(庫房)

마곡사 심검당·고방

심검당은 대광보전 앞마당 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ㄷ자형 평면의 요사이다. 대광보전 앞마당으로 一자형의 평면을 이루면서 대방이 있다. 대방의 전면, 즉 대광보전 앞마당 쪽에는 툇마루가 있었으나 현재는 툇마루를 없앴다. 이 一자형의 건물 동편으로 남쪽과 북쪽에 각각 익사를 두어 전체가 ㄷ자형을 이루도록 했는데, 생활공간의 마당이 대광보전 앞마당에서는 가려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마당 쪽 정면만 몰익공식의 초각을 한 초익공식으로 하여 격을 높였고, 나머지 부분은 민도리집 구조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북쪽 익사 끝은 맞배, 남쪽 익사 끝은 팔작지붕으로 처리했다.

심검당 북편에는 굴뚝이 있고, 다시 그 북쪽 편에 장독대가 있다. 굴뚝은 흙과 기와를 쌓아 만들었는데 매우 큰 규모로 아래에 비해 상부를 많이 줄였고, 상부에 기와지붕을 올렸다. 굴뚝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크고 대담한 조형으로 마곡사 요사 영역 조형의 특성을 이루고 있다.

심검당은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을 지니고 있으나 정확한 연혁은 알 수 없다. 다만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에 1797년 중수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심검당 안에 걸린 편액에 1856년 2월에 중수된 사실과 1909년에 번와공사가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심검당 북쪽 뒤편으로는 담장으로 구획된 영역 속에 누각 형식의 고방이 있다. 누마루 위에 곡물을 저장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누 아래까지 막아 창고로 사용하고 있음이 특징이다. 정면 4칸, 측면 1칸의 민도리집으로 홑처마에 맞배지붕 건물이며, 박공부는 풍판을 달지 않고 개방시켜 가구가 노출되도록 하였다. 건물 안쪽이 아닌 바깥 전면에 통나무를 이용한 계단을 두어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하였다.

심검당 및 고방은 현재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135호로 지정되어 있다.

매화당(梅花堂)·수선사(修禪社)

마곡사 매화당·수선사

영산전 앞마당 북쪽에 위치한 매화당은 요사 겸 수행공간으로 사용하는 건물이다. 영산전 앞마당을 등지고 ‘ㄷ’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이익공식 건물이며, 지붕은 영산전 앞마당 쪽 대방이 있는 부분은 팔작지붕이며, 익사 끝은 맞배지붕으로 하고 박공에 풍판을 달았다. 조선후기 건축의 모습을 따르고 있으나 반듯한 원주와 가구부재를 비롯해 공포 등의 치목 수법은 최근에 중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수선사는 영산전 앞마당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선방(禪方)으로 수행을 위한 공간이다. ‘ㄱ’자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는데, 영산전 앞마당에 면해 길게 一자형의 평면을 이루도록 하고 여기에 크고 작은 방을 배열했으며, 앞쪽에 툇마루를 두었다. 이 一자형 평면의 동쪽 끝에 부엌을 두었고 부엌에서 영산전 앞마당 반대편, 즉 서쪽으로 꺾이도록 했다. 이곳에는 2간 규모의 온돌방을 두고 그 동쪽에 툇마루를 두었다. 민도리집 구조로 팔작지붕 건물이다. 「명부전창건기」에는 1936년에 중건되었음이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