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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

  •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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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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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의 가람배치
법주사 가람배치 팔상전 대웅보전 원통보전 일주문·금강문 사천왕문 진영각 선희궁원당 궁현당 능인전

* 주요전각 클릭 시 관련설명이 나옵니다.

법주사는 미륵신앙과 화엄신앙이 복합된 이중적 신앙 체계를 지니면서 이를 가람배치에 구현했다. 법주사는 화엄신앙의 대웅보전과 미륵신앙의 용화전을 건축 중심으로 동시에 설정해야 했으며 각각의 중심축은 직각으로 교차하면서 교차점에 5층탑인 팔상전을 세웠다. 2개 구성축은 각기 수정봉과 관음봉을 향하고 있어 지형과 교리적 해석이 탁월하게 일치한다. 법주사의 가람배치는 두 봉우리가 직교하는 지형에 따른 구성으로 미륵 신앙과 화엄 신앙의 결합이라는 교리적 의도도 크게 작용했다. 지리적으로는 8개 봉우리가 연꽃잎처럼 사찰을 감싼 불국토의 형국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경내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용화전, 원통보전, 명부전, 능인전, 조사각, 진영각, 삼성각 등 8개의 전각과 일주문, 금강문, 사천왕문, 종고루, 부도전 등 5개의 부속건축물, 그리고 선원, 강원, 염불원 등 3개의 원과 또한 염화당, 용화당, 미룡당, 응주전, 사리각, 종무소를 포함한 10여 채의 요사채들이 남아 있어 약 30여동의 건물이 조성되어 있다.

팔상전(捌相殿)

법주사 팔상전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오층목탑으로 국보 제55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1624년에 사명대사가 복원했다고 한다.

각 면마다 한가운데 계단을 둔 정사각형 월대를 두 단으로 쌓고 그 위에 목탑을 올렸는데 아래층 월대는 땅 속에 묻혀 있다. 월대와 계단은 불전을 초창한 통일신라 때의 것이다. 1층은 사방 5칸이며 한 층 올라갈 때마다 양 끝이 반 칸씩 줄어서 5층은 사방 한 칸이 된다. 지붕은 사모지붕이며 지붕 위에 상륜부는 조선시대 것이다. 1층의 한 변이 11m이며 상륜을 포함한 전체 높이는 22.7m인데 올라갈수록 너비가 급격히 줄어들어 전체적으로 매우 안정감 있는 모습이다.

바닥 한가운데에 심초석이 있고 그 위에 꼭대기까지 닿는 기둥인 심주를 세웠으며 그 둘레에 4층까지 닿는 네 개의 기둥을 세웠고 다시 그 둘레에 3층까지 닿는 높은 기둥 열두 개를 세웠다. 그 후 1층의 바깥기둥과 높은 기둥을 잇는 퇴보 위에 2층의 바깥기둥을 세웠고 3층은 높은 기둥을 그대로 바깥기둥으로 삼았으며 높은 기둥과 하늘기둥을 잇는 퇴보 위에 4층 변주를 세웠다. 또 기둥들 사이를 사각으로 다듬은 보로 연결하여 튼튼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짜임은 목탑을 올리는 전형적인 방식으로 보이며 3층 법당인 금산사 미륵전에서도 같은 방식을 볼 수 있다.

처마를 받치는 공포는 1층은 기둥 위에만 공포를 얹은 주심포식이고 2층에서 4층까지는 공포가 기둥 위에 놓이기는 했지만 다포집 양식으로 구성되었으며 5층은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놓은 완전한 다포식이다. 이처럼 층마다 다른 공포구조는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이 불전의 특징이다. 또 2층부터 4층까지는 기둥 사이에 창을 달아서 빛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팔상전은 석가모니의 생애를 여덟 장면으로 표현한 팔상도를 봉안한 건물이다. 3층까지 한 통으로 트인 팔상전 안에는 가운데 네 기둥 사이를 막아 벽을 만들고, 한 면에 두 점의 팔상도를 배치하였다. 팔상도 앞의 불단에는 각각 불상을 모시고 앞쪽에 오백나한상을 세 줄로 배치했다.

이 불전은 1968년에서 1969년 사이에 완전 해체 수리를 거쳤다. 이때 심초석에 마련된 사리공에서 대리석 합에 든 조그만 은제사리합이 발견되었다. 사리공의 네 벽과 위쪽을 덮은 동판 다섯 장에는 팔상전의 건립 경위를 밝히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고 대리석 합을 싼 비단보자기에도 한글이 섞인 축원문이 먹으로 적혀 있었다. 이 팔상전 사리장엄구는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대웅보전(大雄寶殿)

법주사 대웅보전

법주사 대웅보전은 법주사의 주불전으로 높이 19m에 이르는 매우 큰 불전이다. 바깥에서 보면 2층이지만 안쪽은 아래위층이 한 통으로 트여 있다. 아래층이 정면 7칸, 측면 4칸인 2층 건물로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이다. 옛 건물 가운데 2층 건물은 조선시대의 궁전 건물을 제외하고 절집으로는 구례 화엄사 각황전, 부여 무량사 극락전, 공주 마곡사 대웅전 등 한 손으로 꼽을 정도이다.

신라 진흥왕 때 의신조사가 처음 창건하고, 임진왜란 후 벽암대사의 중창 때(1624년) 세워진 것으로 1893년에 중수되었고, 1976년에 다시 해체 중수를 거쳐 오늘의 모습이 되었다.

3단으로 쌓은 기단 위에 댓돌을 한 단 돌리고 그 위에 건물을 앉혔다. 기단 한가운데 널찍한 계단을 마련했는데 좌우에 둥글둥글한 소맷돌을 세웠고 가운데에 넓적한 돌 석 장을 나란히 하여 계단을 좌우로 나누었다. 이는 부처님을 연에 태워 내모시거나 할 때 그 위로 연이 지나가도록 한 답도(踏道)로 이해된다.

건물의 구조는 안쪽에 높은 기둥을 두 줄로 세우고 그 앞뒤로 바깥기둥을 세워 서로 연결하고 있다. 또 안쪽 네 귀퉁이에 따로 높은 기둥을 세웠는데 이것이 위층에서는 네 귀의 기둥이 된다. 이 건물은 이처럼 높은 기둥을 세우기 위해, 어칸 둘레의 협칸이 바깥의 퇴칸보다 넓은 보통 건물과 달리 협칸보다 퇴간이 더 넓은 특색을 지녔다.

또 다른 특징은 아래위층의 공포가 다른 것이다. 아래층은 내외2출목인데 위층은 내외3출목으로 공포가 한 단 더 높다. 이는 아래층은 기둥이 매우 높기 때문에 처마를 낮추어 허전함을 피하고 위층은 기둥이 아주 짧으므로 처마를 높여 답답하지 않도록 배려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공포의 모양도 아래층 것은 직선으로 뻗었고 위층 것은 곡선으로 들려올라갔다. 1976년 해체하여 중수하기 전에는 서까래만 있는 홑처마였다. 그러나 해체하면서 원래 부연이 있는 겹처마였음이 밝혀져서 겹처마로 중수되었다.

건물 내부 불단에는 비로자나삼존불(비로자나불-노사나불-석가모니불)이 봉안되어 있다. 흙으로 빚어진 이 불상들은 대웅보전이 중창될 때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높이가 5.5m에 이르러 좌불 중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

옛 기록에는 이 건물이 대웅대광명전이라고 되어 있으나 흥선대원군 시절 당백전을 주조하기 위해 미륵장륙존상을 헐어갈 무렵 대웅보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현재 대웅보전은 보물 제915호로 지정되어있다.

원통보전(圓通寶殿)

법주사 원통보전

원통보전은 법주사 창건 당시 의신조사에 의해 지어진 건물로서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24년 벽암대사의 중창 때 복원되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모습이며, 지붕으로는 사모지붕을 올린 흔치않은 모습의 법당으로 보물 제916호이다.

기단은 앞과 오른쪽은 3단, 뒤와 왼쪽은 2단인데 마당이 높아지면서 아래가 묻혀서 앞쪽에 2단, 양옆과 뒤쪽에 1단이 드러나 있다. 앞쪽 가운데에 계단이 두어졌다. 이 기단은 통일신라 말 원통보전이 초창될 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주심포 양식이지만 공포를 짠 방식은 내외3출목으로 다포 양식을 보이며 평방까지 갖추고 있다. 기둥 위에 수평으로 가로놓이는 평방은 기둥 사이의 공포를 받기 위한 것으로 다포양식에서 필요한 부재이다. 이 건물에서는 기둥 사이에 공포를 놓는 대신 커다란 화반을 끼웠다.

지붕은 마루가 한 꼭지에 모인 사모지붕이다. 추녀 아래쪽에는 네 귀퉁이에 모두 추녀가 처지지 않도록 활주를 받쳤던 흔적이 있고 앞쪽 기단 좌우 모서리에 활주 초석이 남아 있다. 지붕 꼭대기에는 둥근 받침 위에 석탑이나 석등의 상륜부와 비슷한 모양의 돌로 만든 절병통이 놓여 있다. 건물의 동쪽 벽은 모두 막혀 있는데 서쪽 벽에는 출입문과 한 쌍의 창이 달렸고 뒷벽 가운데도 창이 있다.

내부에는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1호)을 봉안하고 있다. 천장은 우물반자인데 관세음보살의 머리 위에 닫집을 따로 두지 않고 우물 네 개를 터서 반자를 크게 하여 특별한 자리임을 나타냈다.

일주문·금강문(一柱門·金剛門)

법주사 일주문·금강문

일주문은 사찰의 영역이 시작되는 문으로 정면 1칸의 건물로서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이라는 현판이 있다. 금강문은 일주문과 수정교를 지나 본격적으로 법주사 경내에 들어서면 처음 맞이하게 되는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겹처마 맞배지붕을 올렸다. 중앙의 어칸은 통로로 쓰이고, 양쪽 어칸에는 금강역사와 사자를 탄 문수보살,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을 모셨다.

사천왕문(四天王門)

법주사 사천왕문

사천왕문은 금강문과 팔상전 사이에 있는 문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다포식 맞배지붕 건물이다. 중앙 1칸은 통로이고 양쪽 2칸에는 이 5.7m, 둘레 1.8m의 국내 최대의 걸작품으로 평가되는 천왕상을 2구씩 4구를 봉안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24년 벽암대사가 중건하였다. 현재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어있다.

진영각(眞影閣)

법주사 진영각

진영각은 고승대덕의 영정을 모시는 곳으로 조사각(祖師閣)이라고도 한다. 1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호영 스님의 법주사 전경도에 당시 영자전(影子殿)이라 불렀던 영정을 모시는 전각이 그려져 있다. 지금의 진영각은 1991년에 새로 지었으며, 정면 7칸·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명부전·삼성각과 나란히 서 있다. 진영각 안에는 법주사를 창건한 의신조사와 전법초조 태고선사를 중심으로 모두 27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선희궁원당(宣喜宮願堂)

법주사 선희궁원당

대웅보전의 전면 동쪽(오른쪽)에 자리 잡은 자그마한 건물이다. 조선 21대 왕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곳으로, 1765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건물은 영빈이씨의 위패를 다른 곳으로 모신 후에는 법주사와 관련된 역대 큰스님들의 초상을 모셔둔 ‘조사각(祖師閣)’으로 사용하다가 1990년 대웅보전 서쪽에 진영각(眞影閣)을 따로 갖추면서 지금은 빈 상태이다. 따라서 법주사에서는 ‘구(舊) 조사각’이라 부르기도 한다.

궁현당(窮玄堂)

법주사 궁현당

궁현당은 팔상전 우측에 위치한 건물로 원래 선당(禪堂)으로 중수(重修)된 건물이다. 정면 4칸, 측면 4칸인 남향의 ‘一’자형 건물이었으나, 정면 14칸, 측면 3칸 구조의 동향 건물이 ‘ㄴ’자 모양으로 연결된 형태인 건물이다.

상량문에 의하면 궁현당 선당은 ‘숭정기원사임자년(崇禎紀元四壬子年)’ 즉 1852년에 퇴락된 기존 건물을 철거한 뒤 중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상량문에는 당시 법주사에 기거하던 스님들과 선당을 지은 목수들의 명단을 알 수 있다.

능인전(能仁殿)

법주사 능인전

능인전은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6호) 앞에 자리 잡고 있는 건물이다. 전면 3칸, 측면 2칸의 작은 건물로 이익공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24년 벽암대사에 의해 중창되었다고 한다. 건물 내부에는 석가모니불과 16나한상을 봉안하고 있다.

조선후기 호영(呼映)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법주사전경도」에는 ‘사리각(舍利閣)’이라 표기되어 있어 이 전각이 원래 사리탑 적멸보궁의 예배처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능인(能仁)’이라 함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별칭 중 하나로 ‘능히 일체 중생을 교화하여 이롭게 하는 사람’이란 뜻이라고 하며, 능히 사바세계의 온갖 괴로움을 참아낼 뿐 아니라 그 괴로움 속의 중생들을 견뎌낼 분이라는 뜻에서 능인(能忍)이라 표기하기도 한다.

능인전은 현재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232호로 지정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