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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

  •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법주사

사찰소개 자연환경 역사 가람배치 문화재 인물 설화 안내
법주사의 인물
진표율사 (眞表律師, 미상~미상)
  • 신라 경덕왕 때의 승려로 법명은 진표이고, 속성은 정씨(井氏)이다. 완산주(지금의 전주) 출신으로 아버지는 진내말(眞乃末, 또는 진나마)이며, 어머니는 길보랑(吉寶娘)이다. 11세 때 사냥을 나갔다가 밭둑에서 개구리를 잡아 버드나무가지에 꿰어 물속에 담가두었다. 다음 해 봄 30여 마리의 개구리가 꿰미에 꿰인 채 그때까지 살아서 울고 있는 것을 보고, 참회하며 출가를 결심하였다고 한다.

    12세에 금산사(金山寺) 순제(順濟)를 스승으로 출가하여 사미계를 받았다. 순제는 『공양차제법(供養次第法)』과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을 주면서, 미륵과 지장전에 참회하여 계법(戒法)을 받아 세상에 널리 전할 것을 부탁하였다. 760년(경덕왕19) 변산의 부사의방(不思議房)에서 간절한 참회 끝에, 762년 4월 27일 지장보살과 미륵보살로부터 계본(戒本)과 두개의 목간자(木簡子)를 받았다. 두 보살을 친견한 뒤 산을 내려와 금산사를 중창하고, 속리산·강릉·금강산 등으로 옮겨 다니면서 중생을 교화하였다.

    경덕왕과 왕실 종친들은 그로부터 계품(戒品)을 받고 많은 보시를 했는데, 진표율사는 시주받은 것을 여러 사찰에 나누어 주었다. 그 뒤 금강산에 들어가 발연사(鉢淵寺)를 창건하고 7년간 머물면서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열었으며, 흉년으로 굶주리는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발연사에서 다시 부사의방에 들렀다가 고향으로 돌아가 아버지를 찾았다.

    이 무렵 영심(永深)·융종(融宗)·불타(佛陀) 등이 속리산으로부터 찾아와 계법을 구하였다. 그들에게 의발과 『점찰선악업보경』 및 『공양차제법』, 그리고 189개의 간자와 미륵보살이 준 두 간자를 전해 주면서 이 교법의 유포를 부탁하였다.

    속리산으로 돌아간 영심 등은,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에서 중생을 제도하라는 스승의 부탁에 따라 길상사(吉祥寺, 현재 법주사)를 세우고 점찰법회를 열었다. 이들 외에도 보종(寶宗)·신방(信芳)·체진(體珍)·진해(珍海)·진선(眞善)·석충(釋忠) 등의 뛰어난 제자들이 있어 모두 산문의 개조가 되었다. 말년에 아버지를 모시고 발연사에서 함께 도를 닦았으며, 절의 동쪽 큰 바위 위에 앉아 입적하였다.
도생승통 (導生僧統, 미상~미상)
  • 고려 문종(文宗)의 다섯째 아들로, 넷째 아들인 의천(義天)의 아우이다. 1070년(문종 24) 개성 북쪽에 있는 현화사(玄化寺)의 소현(韶顯)을 스승으로 출가해 승려가 되었다. 법상종의 대가였던 소현의 영향을 크게 받아 그의 신앙 역시 법상종이었다 할 수 있다.

    도생은 후에 법주사 주지로 있으면서 승통(僧統)의 직위를 받았는데, 1096년(숙종 1) 스승 소현이 입적하자 금산사(金山寺)의 주지를 겸직하여 퇴락해가는 금산사를 중수하였다. 그의 행적이나 만년에 대하여는 별다른 기록이 없고, 1112년(예종 7) 정치적 혼란기에 “무장 김택신(金澤臣), 형부상서(刑部尙書) 신행임(申幸任) 등과 함께 거제도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고만 전하고 있다

벽암대사 각성 (碧巖大師 覺性, 1575~1660년)
  • 법주사 벽암대사비(충북유형문화재 제71호) 법주사 벽암대사비
    (충북유형문화재 제71호)
  • 조선시대의 승려로 승군을 이끌던 승군장(僧軍將)이기도 하다. 충청북도 보은 출신으로 법명은 각성이고, 벽암은 호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 황폐화 된 절들을 중수하기도 하였는데, 그 중에는 법주사 또한 속한다.

    10세에 설묵(雪默)에게서 출가하였으며, 14세에 보정(寶晶)에게서 구족계를 받은 뒤 선수(善修)의 제자가 되어 속리산·덕유산·가야산·금강산 등에서 정진하였다.

    임진왜란 때 해전에 참여하였고, 그 뒤 지리산에서 충휘(冲徽)·태능(太能)·응상(應祥) 등과 함께 수행하면서 많은 불교적 시[詩偈]를 남겼다. 1600년에는 지리산 칠불사(七佛寺)에서 강의를 하였다. 1612년(광해군4)에 스승인 선수가 무고로 투옥되자 그도 연루되어 옥에 갇혔지만, 광해군이 그의 덕에 감복하여 선교도총섭(判禪敎都摠攝)에 임명하여 봉은사에 머물게 하였다. 그곳에서 신익성(申翊聖)을 비롯한 많은 사대부와 사귀었다.

    1624년 조정에서 남한산성을 쌓을 때 승군을 이끌고 3년 만에 성을 완성시키자, 조정으로부터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라는 직함과 함께 의발(衣鉢)을 하사받았다. 1632년 화엄사(華嚴寺)를 중수하였고, 1636년(인조14) 병자호란 때는 의승군 3,000명을 모아서 항마군(降魔軍)이라 칭하고 호남의 관군과 함께 적들을 무찌르며 남한산성으로 향하였으나 전쟁이 끝나자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 1640년 쌍계사(雙磎寺)를 중수하였고, 규정도총섭(糾正都摠攝)이 되어 무주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있는 사고(史庫)를 보호하였다. 1641년 6월 해인사에서 머물 때, 조정에서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하고자 하였으나 서울로 가던 중 병으로 갈 수 없게 되어 다시 백운산 상선암(上仙庵)에 머무르기도 하였다. 1642년 보개산에 들어가 불법을 강의할 때, 왕자였던 효종(孝宗)이 화엄종지(華嚴宗旨)를 배웠다.

    1646년 희언(熙彦)과 속리산 법주사에 은거하다가 화엄사에서 입적하였다. 나이 86세, 법랍 73세였다. 제자로는 수초(守初)와 처능(處能)이 있으며, 문하의 제자들이 취미파(翠微派)·백곡파(白谷派)·침허파(枕虛派)·고운파(孤雲派)·동림파(東林派)·연화파(蓮花派)·벽천파(碧川派) 등 7파를 세워서 그의 선법을 크게 전파하였다. 저서로는 『선원집도중결의(禪源集圖中決疑)』, 『간화결의看話決疑』, 『석문상의초(釋門喪儀抄)』가 있으며, 스승의 시문집인 『부휴당집(浮休堂集)』 5권을 편찬하였다.
※자료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